2023. 8. 2. 19:00ㆍ카테고리 없음
집 앞에는 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골목길이 있다. 주차장 옆 좁은 골목길, 교회 뒤편으로 나가는 골목길, 차가 드나드는 경사진 골목길. 이 세 개의 골목길은 각기 다른 모양새와 쓰임 덕에 각기 다른 기억으로 남아있다.
좁은 골목길
주차장의 옆으로 돌아가면 거리로 나갈 수 있는 아주 좁은 골목길이 있다. 이 곳은 좁은 만큼 아늑한 느낌을 준다. 거리에서 골목으로 들어오는 입구가 두 명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은 덕에 거리에서 오는 소음이 많이 가려진다. 그래서 해가 따뜻하게 들어오는 때나 어두워진 밤에 이 골목에 들어서면 괜히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시선에 들어오는 골목길의 풍경도 한 몫하는데, 맑은 낮에는 따뜻한 햇볕과 화단, 붉은색의 단독주택이. 비 오는 날 바닥, 담벼락, 실외기에 툭툭 떨어지며 나는 빗소리가 공간을 감싼다. 밤이 되면 어둠 때문에 보이는 게 거의 없지만 집집마다 켜둔 불빛들이 이웃주민의 걸음을 보살펴 준다.
이렇 듯 이곳은 기억 속에 아늑한 공간으로 남아있지만 어릴 때는 파쿠르 연습 장소이기도 했다. 한창 게임 '어쌔신 크리드'를 좋아했던 적이 있다. 그 게임은 암살이 주 미션인 잠입 액션 게임으로, 주인공이 담을 넘거나 점프를 뛰고 여기저기 매달려 잠복을 하는, 그때 당시 나에겐 너무나도 신선한 게임이었다. 우리 집의 사양 낮은 컴퓨터로는 플레이할 수 없는 게임을 친구네서 하다가 집으로 오는 길이면 게임 속 주인공처럼 여기저기 휙휙 뛰어다니며 집까지 아무한테도 걸리지 않고 도착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때 내 체력이나 운동신경으로 미루어봤을 때 비슷하게나마 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이 골목길이었다.
이 골목길에 있는 담벼락은 밑단이 살짝 튀어나와있다. 그 지점이 그렇게 높지도 않았고 담벼락 자체도 내가 까치발을 들면 너머를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였어서 발로 딛고 올라가기에 충분한 높이였다. 그래서 이 담벼락을 지나칠 때면 우다다 달려가 튀어나온 부분을 밟고 담벼락을 짚은 채 넘어가려 부단히 노력했다. 물론 게임 속 주인공처럼 한 번에, 가볍게 넘어갈 수는 없었지만 조심조심, 차근차근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런 파쿠르 놀이터는 주차장 앞에 있던 턱에서도 할 수 있었다. 이 턱의 최대 장점은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길이 반지하 위치에 있는 주차장까지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덕에 턱의 높이도 점차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내 키와 점프력에 알맞은 높이를 찾아 부드럽게 점프해 올라갈 수 있었다. 나중에는 '대충 저 정도면 올라갈 수 있겠다.'라는 기준이 생겨 연습하지 않고도 우다다 달려가 올라가고는 했다.
교회 뒷편으로 나가는 골목길
교회 쪽으로 나가는 골목길에는 주차라인이 그려져 있었지만 안까지 들어오는 폭이 좁아 경차가 아니고선 주차를 할 수가 없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차가 없는 경우가 더 많았고 그 덕분에 나와 친구들의 놀이터가 되기에 충분한 길이었다.
어릴 때에는 골목에 있는 화단에 쓰레기가 좀 쌓여있었다. 쓰레기 중에는 나무판자, 벽돌 등도 있었는데 그때 나와 친구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빌라를 중심으로 돼 있는 골목을 코스로 이용해서 자전거 경주 트랙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때 버려진 나무판자와 벽돌로 점프대 같은 것들을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우리는 자전거를 꺼내와 그 골목을 한 시간, 두 시간 빙빙 돌았다. 그러다 빌라 주민의 차가 주차를 하기 위해 들어오면 우리는 그제야 자전거를 세우고 만들어 뒀던 트랙을 다시 화단에 치웠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면 다시 화단에서 그 쓰레기들을 꺼내 트랙을 만들곤 했다.
지금은 화단이 완전 정리됐다. 누가 했는지는 모르지만 판자나 벽돌은 당연하고 쓰러져 썩고 있던, 통이 엄청 두꺼운 나무도 치워졌다. 덕분에 벌레들이 가득했던 그곳은 지금은 풀이 자라는 곳이 됐다.
골목길을 지나가면 빌라 반지하의 내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워낙에 창문이 커서 내부가 보이는 것이다. 그 골목에 접해있는 세 개의 빌라 건물 중 두 개는 그나마 베란다 창문이어서 방 내부까지 보이지 않았지만 한 건물은 방 창문이 골목이랑 연결돼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친구와 함께 골목에서 놀던 나는 우리를 부르는 누군가의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봤다. 그 곳은 반지하 창문 너머로 우리를 보고 있는 한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셨다. 평소라면 '죄송합니다~' 하고 다른 데로 갔을 테지만 그날은 그러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본 아주머니의 모습이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긴 얼굴형에 뾰족한 턱, 높은 코에 새하얀 머리.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외국인의 모습이었다! 지금이야 절대 그런 얘기도 생각도 하지 않겠지만 어렸던 나와 친구는 아주머니께 "외국인이에요?"하고 물었다. 아주머니께서는 한국인이라며 극구 부인하셨다. 당연하게도 한국어도 잘하셨다. 하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겉모습에 우리는 외국인 아니냐며 우리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주머니께서는 평생 한국에서만 살았다며 우리의 생각을 쉽게 일축하셨다. 그 후로 몇 번 더 아주머니를 만났다. 바깥을 보고 계실 때 인사를 드리기도 했고 우리가 먼저 창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몇 번은 과자를 주시기도 하셨다. 그러다 언젠지 모르게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우리는 이사를 가신 걸까, 우리가 귀찮으셨던 걸까 생각했지만 그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골목길에는 또 큰 맨홀이 있다. 우리가 도심에서 쉽게 보는 작은 구멍이 몇 개 뚫려있는 맨홀이 아니라 구멍이 크게크게 뚫린, 작은 철판 몇 개 용접해 붙인 듯한 맨홀이었다. 구멍이 큰 덕분에 맨홀 아래가 훤히 보였다. 가장 아래쪽에는 물이 나오는 관 같은 게 튀어나와 있었다. 아마 빌라에서 쓰는 물들이 이곳으로 빠져나오는 듯했다.
한 번은 이 맨홀 뚜껑이 내 거짓말용으로 사용된 적 있다. 어김없이 저녁을 만드시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집 뒤편에 있는 '영광슈퍼'에 갔다. 어머니가 쥐어주신 돈은 심부름을 하고 나서도 조금 남는 돈이었다. 그때 슈퍼는 군것질 조금한다고 2000원이나 들던 때가 아니었기에 작은 초콜렛을 하나 사서 먹고 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어른의 눈을 속이기 어디 쉽겠는가. 본인께서 아시는 것보다 크게 차이나는 거스름돈에 어머니는 나를 추궁하셨다. 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돈을 흘렸는데 맨홀로 빠졌다.'는 말도 안되는 변명을 했다. 어머니께서는 지지 않고 어디 맨홀에 빠졌냐고 물으셨다. 나는 골목길 맨홀이 내려다보이는 베란다로 가 맨홀을 가르키며 "막 이렇게 구르더니 저기에 빠졌어!" 라고 얘기했다. 어머니께서는 몇 번이나 마지막 기회라며 진짜냐고 물으셨지만 혼나는게 두려웠던 나는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행히 혼나지는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거짓말 했다는 것을 분명히 아셨으려니싶다. 누가봐도 거짓말 하는 아이처럼 말하고 행동한데다가 100원 200원도 아니고 예닐곱개의 동전이 맨홀로 굴러가 빠졌다는데, 진짜일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그 때 맨홀 핑계의 성공보다 어머니의 추궁이 더 기억에 남아, 같은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어머니의 훈육법은 성공적이라고 생각된다.
작전동 교회
골목으로 나가는 길에 동네교회가 하나 있다. 지금은 다니지 않지만 유치원-초등학교 때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은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부터였다. 당시 교회는 유치원도 함께 운영을 했었는데, 나는 초등학교 입학까지 약 1년 정도를 남기고 있었기에 그곳으로 등원을 했다. 아무래도 교회랑 함께 하는 곳이다 보니 자연스레 일요일 아동부 예배도 참석하게 됐다. 이사 간 첫 일요일 9시, 아동부 예배가 끝날 때 즈음 목사님은 나와 내 누나를 앞으로 불렀다. 우리는 쭈뼛쭈뼛 나가 섰다. 목사님께서는 새로 온 친구들이라며 소개를 해주셨고 우리는 환영의 선물을 받았다. 아마 과자묶음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 꾸준히 교회를 다녔다. 일주일 내내 교회에 있으니 목사님, 전도사님, 봉사활동하는 형누나들 할 거 없이 두루두루 친해질 수 있었다. 유치원 말미에는 교회 내 입지가 높아진 덕에 성탄 무대에도 설 수 있었다. 그때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 역할로 무대에 올랐다. 자세한 내용까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무대 아래 앉아있는 많은 사람들, 그 사이에 사진을 찍기 위해 앞까지 나와계신 아버지, 내 손목에 못을 박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는 친구의 이미지가 부분 부분 남아있다. 이 외에도 여름성경학교, 달란트 시장 같은 행사도 많이 했는데, 이 얘기는 언젠가 얘기할 기회가 있다면 해보도록 하자.
그렇게 열심히 다니던 교회는 초등학교 4학년쯤부터 다니지 않게 됐다. 아무래도 친구들이랑 놀고 싶기도 했고 아침에 늦잠을 자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교회에서는 왜 오늘 오지 않았냐고 묻는 전화를 하곤 했다. 나는 알겠다고 답할 때도 있었고 전화를 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차츰차츰 교회는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교회가 내 삶에서 멀어진 덕에 변화를 감지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교회 뒤편에는 포도나무 밭이 있었다. 어릴 적 빽빽한 나무들 아래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을 보고 그곳에 계신 - 아마도 전도사님이었을 - 어른께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다. 그분께서는 저곳은 신성한 곳이어서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설명해 주셨다. 이제는 많은 사람이 아는 사실인 포도주 = 예수님의 피라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됐다. 동네를 산책하던 어느 날 아직 포도나무가 있을까 싶어 담벼락 너머를 들여다봤다. 옛날이라면 담벼락에 낑낑 거리며 매달려 봤어야 했을 곳이 이제는 내 키보다 낮아진 담벼락 덕에 손쉽게 볼 수 있었다. 그곳은 아무런 용도로도 쓰이지 않은 빈 터가 됐다. 나무가 있던 흔적은 아예 없고 어지러이 널려진 흙과 돌, 나뭇가지, 풀 등만 보일 뿐이었다.
주말에 본예배가 끝나고 나면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다. 높지 않은 빌라 건물들 사이사이를 채우는 교회의 종소리는, 지금 기억에선 꽤 청아했다. 지금만큼 덥지 않았던 때에, 탈탈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 누워, 낮잠을 자다가, 교회의 종소리에 눈을 뜨고, 부스럭부스럭 뒤척이다 밥을 먹거나 티브이를 보거나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교회의 종은 울리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유는커녕 종소리가 언제부터 사라진 지도 알지 못했다. 문득 알아차리고 보니 오래전부터 종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었다. 동네의 골목골목을 채우던 종소리의 빈자리가 괜스레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경사진 골목길
내가 사는 빌라 단지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길 중 하나인 내리막길은 꽤나 급한 경사의 내리막길이다. 항상 수동차만 운전하시는 아버지의 차를 처음 운전했을 때 이 길을 올라는 데 꽤나 고생을 했을 정도다.
이 내리막길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가는 길은 꽤나 고즈넉한 골목으로 돼있다. 한 편으로는 담벼락과 초록색 펜스가, 다른 한 편으로는 작은 주택이 나란히 있고 듬성듬성 큰 나무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택 안에서 직접 기르는 나무는 꽤나 관리가 잘 돼서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이면 풀이 무성하게 자란다. 그리고 가을이면 감까지 열려 계절의 무르익음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그 주택의 반대편으로는 빌라의 펜스가 쭉 나있다. 특별하게도 한쪽은 벽돌로 돼있는 담벼락이고 한 쪽은 초록색 철로된 펜스다. 같은 빌라인데도 왜 다른 모양의 울타리를 해뒀는지 의문이다. 울타리의 존재 덕에 앞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골목을 통해서만 갈 수 있었다. 울타리가 없었더라면 가로질러 갈 수 있었을 텐데 항상 쳐져 있던 울타리는 그곳 주민들을 항상 프레임 너머로만 보게 했다.
어느 날부터 펜스를 지지하던 주춧돌에 균열이 생기더니 골목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앞으로 쏠렸네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앞으로 기울었다. 지금은 누군가 툭 치면 쓰러질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기울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 펜스가 골목의 끝에서 우리 집 입구까지 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끝에 있는 돌과 울타리가 무너지면 빌라 내 주차된 차들이 나갈 길까지 막힐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울타리 덕에 이제 이 골목으로는 웬만해선 다니지 않게 됐다. 자칫하다가는 차든 사람이든 덮쳐버릴 듯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늑한 공간이었던 곳이 걱정의 공간으로 변했다. 부디 다가올 가을과 겨울, 그리고 앞으로의 계절도 계속해서 볼 수 있게 해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