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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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를 빼다
사랑니가 세상에 나온 건 몇 년 전 일이었다. 매년 치과에 스케일링을 받으러 갈 때면 "이 사랑니는 대학병원 가서 빼셔야 해요."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이거 꼭 빼야 할까요?"라고 물었고 또 그때마다 선생님은 "당장 불편하지 않으시면 괜찮으세요."라고 답해주셨다. 그 대답 덕에 소문으로 무성한 '사랑니의 고통'을 피해 몇 년을 뽑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을 방치하니 사랑니는 점점 더 고개를 내밀었고 그 사이에 음식물이 끼는 경우도 잦아졌다. 사랑니가 많이 나왔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괜스레 사랑니 때문에 다른 치아들도 밀리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일주일전 강렬하게 들었다. 그날은 오전부터 기분 나쁜 편두통이 있었고 그 위치에서 선이라도 긋듯 왼쪽 사랑니부근까지 이어져 ..
2023.12.14 -
기록의 이유
나는 약 반년 전부터 가능한 꾸준히 기록하려 노력하고 있다. 블로그, 유튜브, 인스타그램에 영상, 글, 사진을 통해 내가 살고 있는 시간들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남기는 기록은 단순 내가 겪고 있는 일, 상황을 넘어서 그 안에서 한 생각과 들었던 감정들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것은 지나가는 감정과 생각들이 아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일상을 살아가며 대화하는 시간 속에서 드는 감정과 생각을 흘러가게 두기엔 아쉬웠다. 분명 나는 지금에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훗날 비슷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지금처럼 똑같이 느끼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기억해 두면 언젠가 한 단계 더 확장된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
2023.07.23 -
부엔 까미노! : 일주일의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 - 09.인천
2023년 3월 25일 비행기 14시간... 연착...? 마드리드 숙소에서 눈을 떴을 때는 9시였다. 창 밖이 반쯤 비치는 커튼 너머로 강렬한 햇빛이 들어오고 싶어 했다. 나는 침대에서 더 뒤척이다 몸을 일으켰다. 마냥 가벼운 몸은 아니었지만 어제만치 힘든 것은 아니었다.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 거리로 나왔다. 이제 덥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하늘에는 구름도 거의 없었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지난 주에 파이브 가이즈를 먹었던 마요르 광장으로 향했다. 저번 주에 비해서 사람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광장을 꽉 채우고 있었고 지난주보다 더 많은 화가와 사진가가 광장에 있었다. 나는 광장을 지나쳐 크레덴시알을 받았던 성당으로 갔다. 성당은 변함없이 열려 있었고 내부는 여전히 조..
2023.07.05 -
부엔 까미노! : 일주일의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 - 08. 마드리드
2023년 03월 23일 스페인 시간 01시 오늘은 드디어 마드리드로 돌아가는 날이다. 하루 일찍 일정을 앞당긴 덕에 여유로이 산티아고의 공기를 즐길 수 있었다. 본래 계획대로 이동했더라면 오늘 새벽같이 출발해서 산티아고에 도착, 인증서 받고 기념품 사고 순례자 미사 드리고 저녁 기차를 탔어야만 했을 것이다. 덕분에 알람도 맞추지 않고 잤다. 그렇다고 며칠간의 습관이 쉬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7시쯤 눈이 떠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찍 일어난 것과 몸을 일으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짧은 순례기간의 긴장이 풀린 탓인지, 숙소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던 탓인지. 내 몸의 컨디션도 그리 좋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몸이 너무 무겁고 머리가 아파 약을 한 알 집어 먹고 이불에서 몇 시간 더 몸을 뒤집었다. 시간이..
2023.06.28 -
부엔 까미노! : 일주일의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 - 07.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2023년 03월 21일 스패인시간 22시 오늘은 순례의 마지막 날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날. 원래 계획은 '아르수아'에서 '오 페드로조'로 가 하루 더 묵고 산티아고로 이동하는 것이었지만 앞서 만났던 이탈리아 순례자와의 대화, 왜 순례길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 근 30km를 걷고도 괜찮았던 컨디션으로 미루어보아 오늘은 한 번에 40km를 주파해도 되겠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오늘은 7시쯤 출발했다. 간밤에 비가 왔는지 바닥이 젖어있었고 날씨는 쌀쌀했다. 옷을 잘 여매고 길을 나섰다.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마지막 날이 된 4일 차 만에 출발하기 좋은 시간을 깨달았다. 그리고 첫 길을 출발하자마자 표지판을 놓쳤다. 다행히도 앞서 지나갔던 순례자를 발견해 길을 다시 확인하고 원래 길로..
2023.06.21 -
부엔 까미노! : 일주일의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 - 06. 아르수아
2023년 03월 20일 스페인 시간 20시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이제 6시면 깬다. 하지만 잠에서 깼다고 몸이 다 깨는 것은 아니다. 어제 먹은 맥주 탓인지 피곤함이 남아 더 잤다. 다시 일어나니 7시였다. 간단히 씻고 준비해서 내려가보니 밖은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오늘은 약 30km 를 걷는 날이었고 마침 1층에 빵집을 함께 운영하기도 했기에 아침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짐을 챙겨 내려와 토스트와 오렌지 주스를 주문해 먹었다. 오렌지 주스는 주문하면 그 자리에서 직접 갈아주는데, 전 날 한국인 순례자분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천한 메뉴였다. 실제로 시지도 않고 달달한 데다가 알맹이까지 맛있게 씹히는 게 추천할만 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있으니 순례자분이 1층으로 내려오셨다. 밥을 먹는 내 모..
2023.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