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서야 사랑하는 우리 엄마

2026. 1. 10. 00:00생각에서 나오는 말들/with_think_rain

 대신 나는 내 방식대로 아버지를 기억한다. 나는 글을 쓴다. 망자가 내게 남긴 것들에 대하여. 물론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그날의 일을 기록할 때가 됐다는 느낌이 왔다. 망각 때문이었다. 평생 잊지 않을 것만 같은 일도 시간의 흐름을 견뎌내지는 못한다. 마치 손가락 마디가 움푹 들어갈 정도로 열심히 쓴 깜지 종이를 다음 날 펼쳤을 때 글자가 모두 번져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기억도, 감정도 시간을 만나면 옅어지고 흐려지고 모서리가 둥글어지다 언젠가 불분명해진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그날의 일도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2022년 초가을. 내가 27살을 관통하고 있을 때였다. 그 때 나는 드라마의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한 달만 쉬겠다 선언했다. 작품 중에 우울증이 극에 달해 있었고 예고 없는 공황 때문에 내부를 촬영할 때면 몇 번이고 밖으로 뛰쳐나왔기 때문이었다. 이 상태로 일을 계속하다가 내가 나를 죽이겠다 싶어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그 선언으로부터 한 달이 되기 딱 하루 전이었다.

 나는 쉬는 동안 공부를 핑계로 게을리 지냈다. 한국사 책을 사고 공부하러 간다고 나가 대부분의 시간을 카페에서 노는데 썼다. 유튜브를 보거나 태블릿으로 글을 끄적거리거나 저녁이 되면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 날도 그랬다. 가방에 한국사 책을 챙기고 금방 휘발될 결심을 안고 집을 나섰다.

 내가 나올 때 집에는 나와 어머니 밖에 없었다. 예전에 누나 방으로 쓰던 작은 방을 어머니가 쓰고 있었다. 기억도 안 날 언젠가부터 그 방문은 대부분 닫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 집의 모든 문들은 굳게 닫혔다. 나도 어머니도 각자의 방문을 꼭꼭 닫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열려 있는 안방 문은 아버지의 차지였다. 아버지는 그 문턱 너머로 거실에 있는 티비를 보셨다. 내가 집을 나설 때도 그 방문은 언제나처럼 닫혀있었다.

 언제나처럼 그날도 카페에서 몇 시간을 때우고 동네를 돌아다니다 해가 다 떨어지고 나서야 집에 돌아왔다. 티비 소리와 아버지 사이를 통과해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렇게 뭘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몇 시간을 있었다. 아마 컴퓨터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을 것이다. 거실에서 아버지가 어머니 방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잠겨있었는지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셨다. 집 안에서 이런 짜증 섞인 소리가 나는 게 요 며칠 사이의 일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냉장고 팬 돌아가는 소리처럼, 뇌에서는 소리라고 인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가 났다.

 

 아버지는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구급차를 부르라고 했다.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또 내 이름을 불렀다. 방 문을 열고 세 걸음이면 도착할 거리를 뛰었다. 어머니는 눈을 감고 서랍에 기대 앉아있었다. 어머니를 눕히고 숨을 확인했다. 어떤 바람도 불지 않았다. 몸은 단단했다. 눈을 손으로 열어보니 흐린 눈동자가 허공을 갈랐다. 생명을 잃은 눈동자는 먼지로 가득 찬, 아름답지 않은 우주처럼 보였다. 구급대에서 상황을 알려 달라 그랬다. 아마 알려줬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이름을 말하며 단단해진 다리를 주물렀다. 나는 인공호흡과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숨을 불어넣으면 힘이 들어가지 않는 그 목을 타고 숨이 빠져나왔다. 체중을 싣고 심장을 눌렀다. 휴대전화 너머의 구급대원이 흥분해 있는 나를 위해 속도를 맞춰줬다. 다시 인공호흡, 폐로 들어간 내 숨이 그대로 빠져나왔다. 그 숨 때문에 나는 의식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 심폐소생, 여전히 너무 빨랐다. 또 인공호흡, 또 심폐소생. 다시. 또. 다시.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다. 구급대원의 도착은 실로 빨랐다. 사실 빨랐는지 느렸는지 모른다. 시간이 언제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니까. 그저 그렇게 느껴졌다. 구급대원들의 반응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병원으로 데려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구급차를 타고 갔다. 나는 누나에게 연락을 해 상황을 설명했다.

 

 그 이후 상황이 어떤 순서로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일단 집에 경찰이 왔고 어머니의 유서가 발견됐다. 원망이 담겨 있는 글들이었다.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는 삶, 죽음이라도 제 뜻으로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아버지 차를 몰고 구급차가 간 병원으로 가 가족들과 합류했다. 소식을 들은 친한 성당 어른들도 몇 있었다. 어머니의 사망선고가 의사 입에서 나왔다. 아버지를 모시고 경찰서에 들렀다. 아버지는 진술서를 썼다. 형사가 정황상 자살로 보이지만 혹시 모를 타살 가능성 때문에 부검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반발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아버지를 차에 태우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아버지는 눈이 풀린 채 ‘어떡하지.’라는 말을 반복하다, 중간중간 자신과 가족들의 되돌릴 수 없는 행동들을 비난하셨다. 그리고 금세 말을 삼키셨다. 아마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도덕적 이유 때문일 수도 있고 말할 때마다 떠오르는 스스로의 행동들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장례식장에서는 어떻게 처리가 되는지, 얼마나 비용이 드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부검 때문에 일반적인 순서로는 장례 진행이 어려웠다. 보통 이틀 차에 진행하는 입관 절차가 발인 직전에나 가능했다. 누나는 부은 눈과는 다르게 또렷한 눈동자로, 깊은 우주가 있는 눈동자로 “우리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다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난리가 난 것과는 다르게 집과 물건들은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그저 믿을 수 없는 한 사람의 부재만이 각자한테 남겨져 있었다.

 

 다음 날. 믿기지도 않게 날이 밝았다. 새벽같이 차를 몰고 근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화려한 꽃들의 중앙으로 웃고 있는 어머니의 영정사진이 걸려있었다. 텅 빈 빈소에서 모두가 울었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줬다. 누나의 친구들은 같이 가려 했던 여행도 다 취소하고 3일 동안 빈소를 같이 지켜줬다. 그동안 못 봤던 친구들도 이 먼 거리를 찾아와 줬다. 본인들의 일정이 어떤 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나는 친구들을 붙잡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저 살아가던 하루들을 겪는 것처럼. 그저 장소만 바뀐 것 같았다.

 3일 차가 되던 날, 부검 결과서가 아직 나오지 않아 입관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서 로비에 앉아 1시간을 기다린 끝에 서류를 받아낼 수 있었다. 차에 타 얼른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종이를 들고 뛰어내려 갔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보는 시간이었다.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베풀었던 마음에 화답이라도 하듯 많은 사람들이 입관에 참여했다. 그 작은 공간 안에서 다들 울음을 삼켰다. 어머니는 마치 10년이나 젊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성 두통으로 미간에 자리 잡았던 주름은 없어졌다. 웃음으로 눈가에 자리 잡았던 주름만이 남아있었다. 뽀얗고 보드라운 얼굴이 곤히 잠든 표정으로 떠 있었다. 내가 몇 번이나 만져봤을 그 손과 볼은 생경하게 차가웠다. 나는 그 차가운 몸들을 데울 것처럼 붙잡고 말했다.

“잘했어. 많이 힘들었지? 잘했어.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조심히 가. 잘했어. 잘했어.”

 입관 후에 절차는 여느 장례식과 같았다. 발인을 하고 화장을 하고 나무 아래 묻었다. 시간이 지나 유골함이 분해되며 나무를 키운다고 해 결정한 수목장이었다. 어머니라면 이걸 바랐을 것이라 모두가 생각했다. 어머니를 묻고 나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제야 엉엉 울 수 있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도와준 분들께 밥을 샀다. 성당분들이 많아 아버지가 좀 더 있다가 들어가신다고 해, 먼저 집에 들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들어왔다. 아버지는 곧장 작은 방으로 가 어머니가 쓰시던 이부자리에 누워 울음을 터뜨리셨다. 아이처럼. 나는 그 옆에 앉아 아버지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 큰 덩치, 이 단단한 몸,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쓰다듬기에는 내 손이 너무나도 작았다.

 곧 누나네가 정리를 마치고 집에 왔다. 매형까지 다섯이어서 앉기가 늘 애매했던 식탁이 이제 넷이서 둘러앉을 수 있게 됐다. 찬은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가 만들어두신 닭갈비였다. 어머니의 마지막 저녁이었다.

 

 장례식이 끝났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서류적으로, 법적으로, 행정적으로 해야 될 일들이 남아있었다. 나는 사망신고서, 초본, 가족관계증명서 등 기본적으로 필요한 서류들을 떼러 다녔고 가끔 아버지와 함께 은행이나 구청 등을 함께 갔다. 병원 관련된 서류가 필요할 수 있어 어머니가 자주 다니시던 병원들도 들렀다.

 내과는 내가 어릴 때부터 다니던 곳이었다. 어머니는 더욱이 자주 들르던 곳이었다. 의사 선생님께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하자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 사실 어머니가 내시경을 받기로 하시고 예약을 하셨다고 했다. 소식을 접했는데도 ‘오시겠지.’ 하며 믿지 않으셨다고 했다. 예약 시간이 됐는데도 오지 않으시고 비어 있는 침대를 보고서야 정말인가 보다 싶으셨다고 했다. 정신과도 어머니가 꽤 오래 다니신 곳이었다. 예전에 어머니 대신 약을 받으러 들렀던 곳이었다. 데스크로 가자 신규환자는 당분간 받지 않는다고 하셨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다른 환자보다 먼저 선생님을 뵐 수 있게 해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힘들어할 때는 있었지만 그래도 살아가려는 의지도 있었고 최근에 그런 징조가 없었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가지셨다는 그 의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 의지를 꺾은 데 내 역할이 있었다. 어머니는 많은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다. 매 번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싫어하고 밀쳐내도 그 가시들을 안으며 다가오는 사람이었다. 아직도 그 일방적이고 계산 없는 사랑이 어떻게 가능한 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 사람에게 많은 미움을 줬다. 사랑을 줄수록 더 미워했다. 한 번은 나한테 자신을 너무 탓하지 말아 달라며 힘들다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어쩌라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가족을 미워했고 문을 닫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그 이유들이 모두 가족한테 있다고 생각하고 표현했다. 몇 번이나 날 선 말을 던지고 짜증과 분노가 가득한 눈을 지닌 채 살았다. 그 모든 말과 행동과 사건들이 당신의 살고자 하는 의지를 죽여버린 것이었다.

 이제는 가족들과 웃으면서 지낸다.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로, 아버지를 홀로 남겨두고 독립한 이후로 더 서글거리고 장난스럽고 온화한 가족 구성원으로서 지낸다. 그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왜 그때는 그러지 못했는지, 왜 마지막을 고통 한가운데에서 맞이하게 했는지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남기는 것은 내 망각 때문이다. 내 실수를, 후회를, 죄책감을 망각할 것 같아 기록하기 위함이다. 참 최선을 다 해 미워했었다. 그 덕분에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지점을 지났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아파하기로 했다. 내 잘못을 남겨서. 이 글을 꺼내 또 읽을 때에 내가 갚아야 할 사랑이 얼마나 있는지 스스로 알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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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만들었던 영화다. 어머니와 어릴 때부터 자주 가던 돈가스 집이 있었는데, 어머니를 그곳에서 다시 만나면 무슨 얘기를 나눌까 생각하며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