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참>, 2023

2023. 9. 26. 19:00생각에서 나오는 말들/with_story_rain

오늘은 집 근처 도서관에 왔다. 집 근처? 근처라고 할 수는 없지. 집과 회사,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곳이니. 그 회사도 진작에 전 직장이 됐다. 아직 집에는 사실대로 알리지 못했다. 덕분에 매일 깔끔히 옷을 차려입고 나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장을 입는 회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덕분에 이 더운 여름에도 어느정도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오늘은 하늘색 긴 셔츠에 짙은 파란색 반바지, 주황색 가죽 백팩을 매고 나왔다. 아, 시계도 잊지 않고 차고 나왔다. 내가 잘 볼, 보여줄 사회도 없지만 그럼에도 보여지는 것은 중요하다.
내 하루 일과는 별 다를 것이 없다. 몇 십년을 오가던 출근길을 무의식적으로 가다가 아차 싶을 때 멈춰선다. 그리고 집 방향으로 정처 없이 걸어간다... 정처 없이 걸어간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사람이란 익숙한 길을 택하기 마련이다. 결국 내가 자주 보던 길, 새롭더라도 내가 아는 목적지로 가는 길을 지나쳐 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번 걸었던 길로 돌아가 종지엔 이 도서관에 도착한다. 그래도 좋은 것은 구립도서관이라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는 점이다. 카페처럼 돈을 쓸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오래 있는다고 눈치 볼 필요도 없다.
나는 1층 로비에 있는 넓직한 의자에 앉는다. 일전 유명한 사람이 한 디자인이라고 들었는데, 이건 당연히 가짜겠지. 처음에는 열람실에 있을까 고민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자리를 잡으려면 기계를 이용해야 하고 또 회원가입까지 해야했다. 나는 일찍이 마음을 접어버렸다. 단순 그 방법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 모습이 튀지 않고 잘 묻혀있어야 한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마치 현상수배범처럼 말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실수를 해서 직원이 도와주러 오거나 잘못됐다는 기계음이 들리기라도 하는 날엔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마 평일 이 시간에 다른 지역 사람인게 들키기 싫어서 였을 수도 있고 더 들어가 직업이 없는 사람인게 들키기 싫어서 일 수도 있다.
이 곳에도 오래 앉아 있으면 이상하게 보일까 싶었다. 매일같이 오는 곳이지만 급한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더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에 고개를 쳐박고 있는 모양 그대로 일어났다. 이러면 일이 있어서 급히 나가는 프리랜서 정도로 보일 것이다. 나는 당찬 걸음과 당차지 못한 마음으로 도서관 밖으로 빠져나간다.

<역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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