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호선 여행기>, 2023

2023. 12. 20. 20:00생각에서 나오는 말들/with_story_rain

 슬슬 열이 받기 시작한다. 나는 무려 굴포천역에서 출발했단 말이다. 시간으로만 치면 한 시간이 족히 되는 거리다. 한 시간은 무슨, 집부터 시작하면 한 시간 반은 훌쩍 넘는 시간이다.
굴포천에서 타도 어차피 없을 자리지만, 그래도 나름 빨리 앉아보겠다고 나름 금방 내릴 것 같은 사람 앞에 섰다. 막 차려입지 않은 데다 편해 보이는 복장, 검정 백팩까지. 최소 가산디지털단지, 좀 더 쳐줘도 대림역에서는 앉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가산디지털단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여기서 내리지는 않는가보다. 다음 역에서 내리시려면 슬슬 일어나셔야 할 텐데.. 

 남구로. 여느 때처럼 1/3 이상의 사람들이 내렸다. 그 중 몇 명은 내 앞 좌석 줄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내 앞사람의 머리는 더 바닥으로 기울었다. 

 대림. 주변에 앉아있던 몇 사람이 자리를 비웠다. 동시에 누구한테 뺏길새랴 그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자리를 차지했다. 내 앞사람은 여전히 졸고 있었다. 순간 왜 내리지 않는지 짜증이 확 들었지만 내 편견의 마음을 다그치며 '숭실대에선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숭실대. 앞 사람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무슨 역에 도착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두리번거리며 현재 역을 찾아댔다. '역시 이쯤에서 내리나 보군.' 생각하자 몸을 좌석에 더 깊게 넣으려는 듯 자세를 고쳐 잡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이수, 고속버스터미널, 어느새 강남에 들어섰다. 내 앞 좌석줄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더이상 처음 그 멤버가 아니었다. 센터에 앉은 내 앞사람만 빼고. 우리는 마치 기싸움이라도 하듯 1시간 동안 서로를 마주한 채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우리 둘. 이 자리를 제외하고 모든 것이 흐리게,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내 힘은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나는 두 개의 손잡이를 잡은 채 세우지 않은 마리오네뜨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그대로 떼어 어느 미술관에 전시했다면 '월요일의 고문'이라는 이름의 현대미술작품이 됐을 것이다. 

 진짜 현대미술이 되기 전 앞 사람이 드디어 자신의 가방을 주섬주섬 만져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리가 뺏길라 얼른 자리를 선점해 버렸다. 

 학동역이었다. 

 내가 내리는 뚝섬유원지까지 약 세 정거장을 남겨두고 있었다. 좌석에 몸을 맞대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몇 정거장 남지 않음에 짜증이 가득 찬 상태였다. 그런데 앉자마자 그렇게나 가득한 감성이 쑥 하고 내려가는 듯했다. 나는 잠깐의 이 휴식을 즐기기 위해 눈을 감았다. 

 번쩍. 

 감은 눈의 틈으로 빛이 들어왔다. 동시에 따가운 햇살이 목을 긁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눈앞에는 시원하게 펼쳐진 한강에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한강 위를 내달렸다.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가야겠다.' 싶었다.

 

<7호선 여행기>,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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