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엔 까미노! : 일주일의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 - 02. 마드리드

2023. 5. 5. 22:11with_essay_rain/일주일의 산티아고 순례길!

2023년 3월 17일 스페인 시간 20시 50분

사리아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어젯밤에 예약한 1인실로, 출발 전 마지막 정비를 위한 공간으로 잡았다. 내일부터는 선착순으로 들어갈 수 있는 숙소에 묵을 예정이다.

스페인에 도착한 지 하루도 안 돼서 사리아에 와 있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제 파리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갈아타고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한 게 밤 9시경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역경이 좀 있었다.
마드리드 공항에서 내려서 터미널 표시가 돼 있는 간판을 따라 걸어갔다. 그런데 수하물 찾는 곳이 안 나오고 전철로 가는 무빙워크가 바로 나온 것이다. 알고 보니 한 층을 더 내려갔어야 했는데 2층에 나있는 게이트로 나와버린 것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여행자 안내데스크로 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직원분은 게이트로 다시 들어가면 된다고 안내해 줬다. 나는 공항경찰한테 붙잡혀서 심문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틈을 연어처럼 거슬러 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수하물 찾는 곳에 올 수 있었다.
내 짐은 이미 한 바퀴 돌아 바닥에 놓여 있었다. 짐을 메고 가까운 의자에 앉아서 유심을 꺼냈다. 유심 세트 안에 있는 핀을 꺼내 핸드폰 슬롯에 꽂았다. 그런데 아무리 눌러봐도 슬롯이 열리지 않았다. 급히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럴 땐 당기면서 빼면 된다고 나와있었다. 유심핀을 기울여 넣고 슬롯을 당기면서 빼봤다. 그리고 유심핀이 부러졌다. 더 이상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으로는 이 일을 해결할 수 없겠다 싶어서 짐을 다시 싸고 출발했다.

마드리드 공항 전철역

 

스페인은 한국과는 달랐다. 공항에서 멀어지니 이제 와이파이가 되지 않았다. 나는 한국에서 미리 저장해 둔 여행정보가 담긴 엑셀을 켜 주소와 가는 경로를 확인하고, 숙지해 온 교통카드 발급법을 더듬더듬 기억해 내며 교통카드를 샀다. 다행히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역으로 내려가려는데 내가 타는 방향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아무데나 내려가보니 양 플랫폼 모두 사람이 비등비등 있었다. 벽에 노선도가 나와있어 확인해 봤다. 알고 보니 반대편 플랫폼이어서 다시 넘어갔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전철이 들어왔다. 절도가 무서워 가방을 내리지도 못하고 서서 갔다. 그 때 한 사람이 앰프를 들고 들어와 뭐라 얘기를 하더니 랩을 하기 시작했다. 전철 내에서 버스킹을 하는 사람인 듯했다. 프리스타일 랩을 하는 것 같았는데, 한 사람 한 사람 가리키며 쉼 없이 말을 뱉어냈다. 끝에서부터 계속 오더니 나한테 와서도 랩을 하며 주먹인사를 했다. 나는 여유롭다는 듯 주먹인사를 받아주고 악수까지 했다. 전철 아티스트는 랩을 마치고 모자를 들고 한 바퀴를 돌았다. 나도 주머니에 있는 약간의 동전을 그 모자에 넣어줬다.

중간에 전철을 갈아타서 목적지인 베고냐 역에 도착했다. 이제 기억에 의존하며 길을 찾아가야 했다. 내가 가진 정보는 거리 이름인 'Paseo de la castellena' 뿐이었다. 전철 역 안에 있는 지도를 통해 해당 거리를 확인하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큰길 건너편에 빌라들이 모여있었다. 그곳으로 건너가니 벽에 거리이름이 적혀있었는데 바로 내가 찾던 거리 이름이었다! 나는 이제 집번호만 찾으면 됐다. 그런데 번호가 100번이나 큰 숫자였다. 내가 찾는 숫자로 가기엔 꽤나 걸어가야 할 것처럼 보였기에 길을 잃을까 걱정이 됐다. 그래서 발걸음을 떼기 전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주민분께 주소를 보여주며 길을 물었다. 그분은 이 길이 쭉 카스텔레나 길이고 아래 방향으로 내려가면 된다고 알려주셨다. 예상했던 대로 꽤 걸어 내려가야 하는 길이었다. 그래도 안심하며 가르쳐주신 방향으로 갔다.
길을 가다가 꽤나 고급져 보이는 식당이 보였다. 왠지 이 곳이라면 와이파이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문 앞에서 와이파이를 켜봤다. 역시나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었다. 가족에게 잘 가고 있다는 연락을 남기고 지도를 확인했다. 5분 정도만 내려가면 되는 길이었다. 나는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는 245번 집에 들어가야 했는데 246 다음에 244번이 나오는 것이었다. 왜 그러지 싶어서 그 주 변을 한 바퀴 돌았다. 하지만 245번 집이 나오지 않았다. 설마 싶어서 반대쪽 길로 건너갔다. 그러자 홀수 집 번호가 나왔다. 길을 중심으로 - 당연하게도 -한쪽은 짝수집, 한쪽은 홀수집이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왔던 길을 올라가야 했다. 그렇게 약 한 시간 반을 걸려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Paseo De La Castellana 거리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유심슬롯 구멍에 꽂을 수 있을 법한 걸 찾았다. 더이상 핸드폰 없이 길을 돌아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문득 어느 숙소에나 있는 와인 오프너가 생각났다. 나는 주방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당연스럽게도 오프너가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오프너 끝을 슬롯 구멍에 걸고 조심스레 당겨보기 시작했다. 슬롯이 조금씩 들리면서 빠질 듯 말 듯했다. 그러다가 쑥 하고 슬롯이 빠졌다. 비롯 슬롯 구멍 한쪽이 부서졌지만, 아무튼 슬롯은 빠졌고 새로운 유심 인식에도 문제가 없었으니 그 정도 상처는 아프지도 않았다.

이렇게 각종 역경들을 이겨내고 만찬을 즐기러 무작정 거리로 나갔다. 숙소 바로 밑에는 평이 좋은 식당이 있었는데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웨이팅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무리도 있었고 길에 깔려있는 테이블들도 자리가 꽉 차 있었다. 건물을 끼고 돌아 아르헨티나 음식을 파는 식당을 갔다. 그곳에는 사람이 없어 여유롭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사장님이 당황한 표정으로 오늘 영업이 끝났다고 알려줬다.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막막한 마음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어디 가서 뭘 먹어야 하나 싶었다.

무작정 숙소를 찾아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길 한 편에 있는 식당을 찾았지만 의사소통에 두려움이 엄습해 와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다. 걸음의 끝에 타코벨과 맥도날드가 있었다. 한국에서 처럼 자연스럽게 맥도날드로 들어갔다. 내부 모습은 너무나 익숙했다. led 메뉴판, 키오스크, 맥도날드 특유의 매장 모습은 한국의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누가 봐도 빅맥인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붙어있었다.
하지만 나는 맥도날드를 나왔다. 먹고 싶지도 않았고 그 정신없는 틈에서 되지 않는 의사소통으로 주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지나쳤던 식당을 다시 마주했다. 문 옆에 통유리창에는 메뉴판이 붙어있었다. 나는 그 메뉴판 앞에서 내가 들고 나온 돈으로 뭘 먹을 수 있는지 계속 살펴봤다. 한 10분은 그렇게 서 있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외국 현지 식당에서 주문하고 먹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결국 나는 용기를 내서 가게로 들어섰다. 햄버거를 시키겠다는 결심과 함께.

결국 나는 햄버거를 먹지 못했다. 맥주만 주문했기 때문이다. 물론 맥주가 먹고 싶기는 했지만 햄버거를 주문하는데 들이는 의사소통이 두려워져 맥주만 주문했다. 맥주는 '비어'라고 말만 해도 다 알아들으니까.
사장님은 생맥주를 하나 따라주셨다. 맥주를 받고 금액이 얼마일까 두려워졌다. 메뉴판도 안 보고 주문했기 때문이었다. 걱정이 돼 메뉴판을 확인했지만 따로 나와있지는 않았다. 스페인어를 몰라서 그런 건가 싶어 사장님께 여쭤봤다. 하지만 의사소통이 잘 된 거 같지는 않았다. 메뉴판을 가리키시면서 '마실 거? 먹을 거?'만 반복하셨다. 나는 다시 묻지도 못하고 당황해하며 그냥 알아들은 척했다.
그때 다른 직원분이 나타났다. 그분은 나에게 계란으로 만든 음식과 빵을 서비스로 주셨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파파고를 켜서 다시 맥주 이름을 물었다. 직원분은 '아~' 하시면서 맥주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맥주는 에스텔라였다.
우리는 번역기를 사이에 두고 어럽게 어렵게 의사소통을 했다. 번역기도 쓰고 짧은 영어도 하면서 웃고 떠들었다. 이해하지 못하면 다시 묻고 알아들으려고 노력하고, 이해하면 맞다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그 직원 분은 자신의 친구가 한식당을 운영한다며 불고기 집 명함을 주었다. 꼭 가보라고 했다. 물론 결국 못 갔다.

맥주 두 잔을 먹고 6유로를 계산하고 나왔다. 들고 나온 돈보다 한참 저렴해 다행이었다. 

다음 날 숙소에서 느지막이 일어났다. 전 날 26시간을 깨어있던 덕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사리아로 가는 전철을 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남았었기 때문에 여유롭게 준비해서 길거리로 나섰다. 날씨는 봄답게 따뜻했고 길거리에 사람들은 활기가 넘쳤다. 나는 내 짐들을 매고 마드리드 중심지로 향했다.

'Sol' 역에 내려서 미리 찾아 놓은 성당으로 갔다. 크레덴시알을 받기 위해서였다.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은 순례가 끝나고 순례자 인증을 받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사실 그 자체만으로 해도 큰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다.

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건물 밖의 모습은 마드리드 길에 있는 여타 건물과 비슷한 모양새였는데 건물로 들어가자마자 한국에서 보던 성당과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곳곳에 있는 조각상, 중앙에 걸려있는 그림은 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 다른 놀라운 점은 누구에게나 성당이 열려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별히 자신들만의 부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기도를 하러 온 사람이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형태였다.

Royal Church of Saint James and Saint John the Baptist


성당 내부에 매료돼 있다가 정신을 차려 크레덴시알을 발급 받는 곳을 찾았다. 그러다 성당에서 일을 하시는 거같은 분을 찾아 크레덴시알을 발급받으러 왔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사무실로 바로 안내해 주셨다.

사무실에서 둘이 마주 앉아 크레덴시알을 발급받았다. 나도 그 분도 영어를 능숙하게 하지 못했지만 열심히 설명해주고 열심히 대답했다. 일단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대화였다. 대화에는 "여권을 달라.", "하루에 도장 두 개 받아야 한다.', "도장을 받을 수 있는 곳 알려주겠다." 같은 것들이었다. 크레덴시알을 발급받고 그분께서는 약간의 기부를 하고 가라고 안내해 주셨다. 그분의 친절함에 너무나도 흔쾌히 동전을 몇 개 넣고 기도를 잠깐 했다.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전 날 비행기에서 공부하던 말을 드디어 써먹었다!
"무차스 그라시아스!"

성당에서 나왔을 때는 기차시간까지 약 세 시간 정도가 남아있을 때였다. 그래서 드디어 '파이브가이즈'를 갔다! 햄버거를 꽤나 좋아하는 나한테는 우리나라에 아직 들어오지 않은 프랜차이즈를 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 그 순간 나한테는 파이브가이즈가 마드리드의 맛집이고 명소였다.

파이브가이즈에 도착했을 때는 오픈까지 약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돌아다니기도 애매해서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11시. 문이 열리고 대기줄 없는 햄버거집에 혼자 오픈런을 했다. 들어가자마자 카운터에 텐션 높은 직원이 신나게 맞이해 줬다. 주문 한 문장에 사담 하나였다. 서로 뜨문뜨문 영어를 주고받으면서 대화했는데, 어디서 왔냐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마드리드에 한국 사람이 많이 온다고 얘기해 줬다. 그래서 "나도 많이 만났어. 여기 한국인 줄 알았다니까. 한국인 옆에 한국인... 그 옆에 또 한국인..."하고 대답했다. 사실 한 명도 만나지 못했지만 파이브 가이즈 친구는 재밌다면서 웃었다.

신나는 파이브가이즈에서 봉투를 받아 들고 마요르 광장으로 갔다. 사람이 많았지만 사람 한 명 앉을 틈이 없을 리가 없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햄버거를 우적우적 먹기 시작했다. '그냥 햄버거 맛이군...' 하는데 그 안에 감자튀김은 봉투의 절반만큼이나 들어있었다. '이게 파이브 가이즈인가.' 하면서 마드리드의 햇살 아래 모두 먹어치웠다.

마요르 광장의 펠리페 3세 기마상


시간은 가고 어느덧 기차를 타러 갈 시간이 됐다. 'Sol'역에서 다시 'Chamartin'역까지 갔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용산역이나 영등포역쯤 되는 모양이었다.
전철에서 나와 기차를 타러 가는 길까지가 꽤나 복잡해, 직원들에게 물어물어 기차 플랫폼에 도착했다. 특이하게도 이곳은 기차를 탈 때도 수하물 검사를 했다. 수하물 검사를 마치고 시간이 딱 돼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제 전선으로 간다.

차마르틴역 렌페 탑승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