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엔 까미노! : 일주일의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 - 03. 사리아

2023. 5. 24. 19:00with_essay_rain/일주일의 산티아고 순례길!

2023.03.17. 스페인 시간 20시 50분


"내리라구요?"
여기는 오우렌세인데.. 사리아까지 기차가 알아서 데려다주는 줄 알았는데, 뭔가 착오가 있는 듯했다.

기차를 탔을 때는 한국에서 타던 ktx와 다르지 않아서 크게 감흥은 없었다. 감흥이라고 한다면 다 사람사는 곳, 생긴 것도 다 비슷비슷하구나 하는 정도랄까. 그저 외국인들이 좀 많이 타는 날이라는 생각이었다. 일찍 들어와 좌석에 앉아있으니 옆 좌석 승객이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간단하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토종 한국인으로서 너무나도 익숙하지 않은 문화였던 데다가, 한창 대화 자신감이 없을 때라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황급히 이어폰을 꺼내 꼈다. 이렇게 '한국인은 무뚝뚝해.'라는 편견을 누군가에게 심어주게 되는 걸까? 아무튼 상대도 내 행동의 의미를 알았던 것인지, 아니면 진짜 인사를 건네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인지 태블릿으로 넷플릭스를 보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은 스몰토크를 일상적으로 한다는 얘기를 유튜브에서 봤었는데 정말인 거 같았다. 그냥 지나가면서 눈만 마주쳐도 가볍게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지금처럼 옆 자리에 앉아도 인사를 건네니 말이다. 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인사를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싶었다.

기차가 출발하고 눈을 감았지만 그리 깊게 자지는 못했다. 좌석이 영 불편하고 선반에 올려놓은 물건을 누가 훔쳐가진 않을까 싶어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할 수 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넓은 초원과 돌아가는 풍력발전기로 아름답던 바깥 풍경은 같은 장면을 이어 붙인 것처럼 변화가 없었고, 그마저도 계속 터널에 들어가 검정색 창문 말고는 볼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동시에 무선인터넷도 안돼 유튜브고 넷플릭스고 영상을 저장해 두지 않은 나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가 감는 것처럼 뜨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음식을 파는 매점칸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기차를 탈 때, 심지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무궁화호를 탔을 때도 매점칸은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사실상 인생 첫 매점칸은 스페인 렌페였던 것이다. 렌페의 매점칸에 도착했을 땐 이미 공간이 꽉 차 보일 정도로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창쪽에 있는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고, 누군가는 바에 서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남은 자리가 바 구석진 곳밖에 없어서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점심에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그렇게 먹어 배가 고프진 않았기 때문에 콜라 한 잔만 주문했다. 점원분은 내 주문을 받으면서 흔들리는 차를 서핑하듯 타며 뜨거운 커피를 따르고 계셨다. 이렇게 계속 몇 시간 서있으면 멀미하지 않으려나 생각이 들 때 콜라 한 캔과 컵이 내 앞에 놓였다. 다른 나라들도 다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해외에 나와서 정말 좋았던 것 중에 하나는 콜라를 시키면 꼭 레몬이 담긴 컵을 준다는 점이었다. 그전까지 그렇게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콜라에 레몬을 넣어서 먹으니 끝에 느껴지는 레몬 맛이 콜라와 꽤나 잘 맞는 게 너무 마음에 들었다. (후에 한국에 들어와서도 콜라를 주문하면 레몬을 함께 주문해 먹기도 했다.)

콜라를 마시면서 바깥 풍경을 보고 있으니 창문에 비가 가로로 지나갔다. 안그래도 오늘 비 소식이 있었던 거 같은데, 이제부터 비가 쏟아지려는 모양이었다. 풍경은 여전히 초원과 풍력발전기 그대로였다. 내가 유로트럭을 한창 했을 때 고속도로만 나가면 초원에 풍력발전기만 있어서 '맵이 방대하니 비슷하게 구현하기에는 어쩔 수 없었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명성에 걸맞은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도 비 오기 전에 풍경 한 번 더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창 밖으로 보이던 초원


자리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러다 옆 승객이 내 앞을 지나가는 기척에 깼다. 많은 사람들이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벌써 종착지인 사리아에 도착한 것인가 싶어 안내판의 역을 확인했다. 안내판에는 'Ourense'라고 나와있었다. 순서상 사리아까지는 조금 더 가야하는 곳이었다. 나는 '아직 한참이군.' 하면서 다시 자리에 몸을 맡겼는데 뭔가 이상했다. 칸에 있는 모든 승객들이 기차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의심은 들었지만 이곳에 사람이 많이 사는가 싶었다. 마치 내가 여수까지 가는데 승객들이 전주에서 다 내리는 상황인 것처럼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기차에 나만 남았는데 어째서인지 기차는 출발하지 않았다. 그러다 칸 끝 문이 열리더니 차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분이 들어오셔서 스페인어로 무어라 말씀을 하셨다. 나는 "저는 사리아까지 가요."라고 영어로 대답했다. 그분은 내려야 한다고만 말씀하다가 말이 안 통한다고 느끼셨는지 포기하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내리지 않을 수는 없으니 밖으로 나왔다. 우선 사람들이 향하는 곳으로 가보자는 것이었다.

곳곳에 있는 전광판을 확인하면서 'Sarria' 라고 적혀있는 곳을 찾았지만 어느 곳에도 적혀있지 않았다.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거지? 이 마을에서 숙소를 잡아야 하나? 원래 내일부터 순례길 시작이었는데 일정을 하루씩 미뤄야 하나? 그렇게 되면 마을 이동을 어떻게 해야 하지?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로비 쪽에 가면 직원분께서 알려주시겠지 싶어 바깥으로 나갔다. 밖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오자마자 한 여성분이 '사리아 가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분명히-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맞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밖에 있는 버스들 중에 가장 앞에 있는 버스를 타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설마 싶어 밖으로 나가니 버스터미널처럼 버스들이 줄지어 있었다. 가장 앞 버스에는 'Ourense - Lugo'라고 적혀있었다. 혹시나 싶어 앞에 계시던 직원처럼 보이던 분들께 한 번 더 여쭤보니 사리아로 가는 버스다 맞다고 했다. 세상에 그렇게 안심했던 적이 없는 거 같다. 아마도 신께서 '목표까지 그리 쉽게 보내줄 수 없지.'라고 생각하면서 간당간당하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시련을 주시나 싶었다.

버스에 탑승하니 이미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는 같은 칸에 있던 사람들, 심지어 바로 옆에 앉아있던 승객까지 보였다. 나는 가장 끝 자리 창가에 앉아 핸드폰을 켜 렌페 티켓을 확인했다. 사실 이미 해결된 마당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겠지만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도 기차를 타야 했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서 놓친 건지 확인해야 했다. 티켓은 모두 스페인어로 적혀있었기 때문에 캡처를 해 번역기로 확인했다. 자세히 보니 하단에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조금만 더 꼼꼼히 확인했더라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다음 주에 탈 산티아고 티켓도 확인했다. 다행히 놓친 부분은 없었다.

버스를 타고 약 두 시간 정도 달렸다. 사리아에 가까워질 수록 비가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따로 챙겨 오지는 않아서 우비를 꺼내둬야 하나 걱정했지만 사리아에 도착하니 비가 그렇게 많이 오지 않았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숙소로 향했다.

사리아의 주도로


사리아는 조용한 도시였다. 우리나라 여느 시골마을의 읍내같은 느낌이었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고 차도 많지 않아 소음이라고 할 것들이 많이 없었다. 이곳에 도착해서도 '와! 유럽 마을!' 이런 느낌보다는 역시나 다 사람 사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나마 특별히 생각했다고 한다면 정비된 티르코네일(게임 '마비노기'에 나오는 마을. 마비노기의 시작 마을이다.) 같았다. 낮은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바닥은 돌로 포장돼 있었으며 규모가 작지 않은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하천 위에는 또 돌로 만들어진 다리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식당들과 가로등들이 있었다. 게임에 들어온 거 같기도, 영어마을 같기도, 왠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NPC같기도 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다른 건 우리나라에 있는 이국적인 모습의 마을들과는 다르게 주변에 참 잘 녹아들어 있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확실히 우리나라다운 건물들과 마을의 풍경이 더 잘 어울리는구나 싶었다.

약 15분 쯤 걸었을까 미리 예약해 둔 숙소 '알베르게 푸엔테 리베이라'(Albergue Puente Ribeira)가 보였다. 이 숙소는 사립 알베르게였는데, 오늘은 이곳의 개인실을 예약했다. 가격도 알베르게답게 16유로 정도 했던 거 같다. 사실 공립 알베르게가 8유로 정도 하니 순례자한테는 조금 과분해 보이기는 해도 숙소로 16유로면 굉장히 좋은 가격대였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부터 숙소의 창 너머로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아마 이 곳의 사장님이신 거 같았다고 생각할 때 나랑 눈이 마주치고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주셨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예약을 했다고 말했다. 사장님께서는 여권과 순례자 여권을 달라고 하시고 금세 체크인 절차를 마무리해주셨다. 사장님은 자신을 따라오라면서 방과 편의시설의 위치와 주의사항을 알려주시고 키를 주시더니 푹 쉬라고 말씀하시고 떠나셨다. 나는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바로 다음 날을 위한 준비를 했다. 카메라 배터리, 태블릿, 핸드폰을 충전하기 시작했고 돈을 한 번 더 분류했으며 오늘 씻을 것과 갈아입을 옷, 내일 입을 옷을 꺼내 놓고 가방을 다시 정리했다. 가방을 배낭 하나만 들고 와 배낭이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옷 하나를 꺼내면 이렇게 갈아엎어 정리해야 했다. 겸사겸사 잃어버린 건 없는지 소지품 검사도 할 수 있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일 가야 할 길들 과 날씨를 미리 확인했다. 드디어 내일이 출발하는 첫날이었다.

핸드폰이 적당히 충전됐을 때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비는 이미 그쳐있었지만 비가 온 직후라 꽤 쌀쌀한 상태였다. 겉옷을 챙겨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까 체크인을 할 때 사장님께서 하천을 따라가면 식당과 카페가 있다고 알려주셨기 때문에 무작정 그 길로 나섰다. 식당들이 줄지어 있었지만 모든 식당이 열려 있지는 않았다. 앞에 나와있는 메뉴판들의 가격을 보면서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식당이 늘어서 있던 하천길


식당에 들어가 바 자리에 앉았다. 책상에 조금 끈적한 느낌이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은 많으니까. 무엇보다 내가 호화스러운 식당에 온 것도, 그 정도의 것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직원분에게 메뉴판을 달라고 했다. 아무래도 다양한 나라의 순례객들이 많이 지나치는 마을이다 보니 메뉴판의 한 면은 영어로 번역 돼있었다. 영어로 된 메뉴판을 읽으면서 No.4라고 돼 있는, 베이컨, 빵, 계란, 감자튀김이 나오는 메뉴와 맥주를 하나 주문해 먹었다. 맥주는 어제 먹었던 것과 같은 맥주였다. 역시 스페인 국민 맥주인 것이 확실하다. 음식 맛은 특별하지는 않았다. 굳이 특징을 나열하자면 빵은 질겼고 베이컨과 감자튀김은 짰다. 물론 당연스러웠다. 아무튼 한 끼 해결했으니 좋다고 생각했다.

밥을 먹고 나왔을 때는 해가 이미 넘어가 있었다. 동네에는 사람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도로에는 퇴근 하는 차들이 줄 서 있었고 골목에 있는 바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을에 있는 성당을 들러볼까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이미 닫혀있을 거 같았다. 열려있다 하더라도 숙소와 반대쪽에 있었기에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괜히 가는 길목 어두운 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하는 편견 섞인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바에 있던 사람들(좌) 길가에 있던 바버샵(우)
사리아의 골목


물을 미리 사둘까 싶어 마트에 갔다. 규모가 청평 어딘가에 있는 하나로마트만한 마트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을 보고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스페인 물에는 'Débil'과 'Muy Débil'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Débil은 약하다는 뜻으로 물에 잔유물이 많이 있다는 얘기고,  Muy Débil은 매우 약하다는 뜻으로 잔유물이 많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물에 예민한 사람들은 Muy Débil 이 적힌 물을 먹으라는 얘기였다. 잔유물이 없는 걸 굳이 매우 약하다고 표기하면서 까지 약하다는 표현을 쓰는 걸까 싶었다. 파는 물건이 물이니까 강하거나 많이 들어있다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았던 비즈니스적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아무튼 Muy Débil이라고 돼 있는 물도 없고 약 이틀 동안 물갈이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Débil이라고 적혀있는, 제일 저렴해 보이는 물을 사서 나왔다.

물을 사서 나오니 어느새 8시 반이었다. 이제 숙소로 가서 잘 준비를 하고 내일을 준비할 시간이다. 한국에서의 수면 습관을 이어서 순례 첫 날 부터 늦잠을 잘 수는 없다. 제발 푹 잠들 수 있었으면.

언덕위에 있는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