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네, 나의 역사 : 01. 현대종합상가

2023. 7. 19. 19:00with_essay_rain/나의 동네, 나의 역사

저녁시간 현대상가의 모습

현대종합상가 

나는 유치원 때부터 살았던 빌라에서 20년째 살고 있지만 현대아파트 앞 상가의 혜택은 아파트 주민만큼이나 톡톡히 이용했다. 건물 안에는 빵집, 자전거 수리점, 편의점, 떡볶이집, 은행, 병원, 학원 등 필요한 것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아과 

어릴 적 몸이 아프면 건물 안에 있는 소아과에 가곤 했다. 지금이랑 다르게 그땐 잔병치레를 꽤 했어서 자주 갔던 편이었다. 기억으로는 소아과가 무서운 기억은 아니었다. 기억 속 소아과는 불을 켜두지 않은 덕에 한 쪽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적당한 대비를 만든 아늑한 공간이었다. 선생님도 간호사분도 모두 친절하셨고 워낙 자주 갔기에 얼굴을 기억해 주시고 아프지 말라며 항상 인사를 해주셨던 기억이 있다.
그때 병원을 왜 그렇게 좋아했나 생각해 보면 1층에 같이 있던 약국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어린 나이 답지 않게 약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약의 맛을 좋아한 거지만. 내 세대 사람들은 모두 기억할 노마, 부루펜, 비타민부터 시작해서 박카스, 배즙, 쌍화탕까지 좋아했다. 한 번은 집에 있던 부루펜을 누나와 함께 부모님 몰래 꺼내먹었다가 나중에 양이 줄은 부루펜을 본 어머니께 혼난 기억도 있다. 아무튼 약국에서 약을 받으면 약사님께서는 항상 비타민 몇 개를 봉투에 함께 넣어주시곤 했다. 결국 젯밥을 얻을 수 있으니 제사는 하는 것까지 좋아한 셈이다.
여전히 소아과는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가지 않게 됐다. 나이가 조금 차니 어머니의 손을 잡고 길 건너편에 있는 내과로 갔기 때문이다. 어느 날 어머니께 왜 항상 가던 병원으로 가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내과와 소아과의 의미를 전혀 모를 때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머니께서는 소아과는 애기들이 가는 곳이라 이제 내과에 가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 후 그 소아과에 가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선생님이 그대로 계신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본인의 이름을 달고 운영하시는 곳이니 그 자리에 계시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계신 게 맞다면 이 동네 아이들은 웬만해서 그 선생님의 덕을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소아과



외한은행에서 하나은행으로 

병원이 있는 건물 2층의 복도를 따라가면 지금은 하나은행이 된 외한은행이 있었다. 가끔 어머니를 따라 은행을 가곤 했다. 그곳은 은행 지점이 한 편에 있었고 복도를 중심으로 반대편에 ATM이 있는 공간이 있었다. 특히 이 ATM이 있는 곳은 내가 좋아했던 곳들 중 하나였다.
그곳은 은행만큼 가만히 있어야 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을 조심해야 할 공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른들은 쓸 수 있지만 아이들은 함부로 건들면 안 되는 물건'이 있는 곳이니 괜히 더 호기심의 공간이기도 했다. 때로는 아무도 없으면 슬쩍 다가가 기계 곳곳과 화면을 조심스레 관찰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런 물건은 ATM기 뿐만 아니라 파쇄기도 있었기에 관찰할 거리가 풍성했다. 파쇄기의 전원을 몰래 켜보기도 하고 누군가 대충 버리고 간 명세표를 주워 파쇄기에 넣어보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이 공간에서 은은하게 나는 냄새가 좋았다. 지금도 정확히 무슨 냄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기계 냄새이지 않을까 싶다. 이곳은 한 여름에 가면 특히나 더 좋은 공간이었다. 그때 당시에 이만큼이나 에어컨을 시원하게 트는 곳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동문이 열리면 차갑게 다가오는 공기 속으로 들어가 좋아하는 냄새에 둘러 쌓인 채 신기한 기계들과 놀고 있노라면 이만한 재밋거리가 없었다. 
은행도 ATM기도 그때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외한은행이 하나은행으로 바뀌었다는 점, 은행 안에 있는 대기석이 괜히 더 좋아 보이는 소파로 바뀌었다는 점, 번호표 뽑는 기계도 키오스크 같은 기계로 바뀌었다는 점같이 자잘한 것들 뿐이다. 그 와중에 제일 크게 달라진 것이라면 그곳에 가도 그때만큼의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기계들은 재미있고 은은한 냄새도 조금은 기억나지만, '아이'라는 존재였기에 용납 가능했던 일을 지금의 내가 한다면... 아마 CCTV를 보던 보안요원에게 붙잡힌 채 왜 그랬는지 설명해야 할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다. '어른'이라는 존재가 가져야만 할 눈치는 어린아이 때의 재미를 충분히 느끼지 못하게 한다. 

놀이터였던 ATM



경비실 

1층과 2층 사이에는 작은 경비실이 있다. 요즘 건물들에 있는 것과는 다르게 철판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곳에는 경비실이라는 글자와 함께 경비 아저씨가 계셨다. 자리에 안 계실 때는 건물 순찰을 돌고 계시거나 근처를 청소하고 계셨다. 건물 내 학원을 다니던 때라 아저씨를 뵐 때마다 인사를 드렸던 기억이 난다. 사춘기가 무르익어갈 때쯤부터는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인사를 안드리기도 했었다.
경비실 안에는 모니터가 있었는데, 모니터에는 건물에 있는 CCTV의 화면이 항상 띄어져 있었다. 그곳을 지나갈 때 경비아저씨가 안 계시면 화면을 보며 건물 내부의 모습을 보곤 했다. 워낙 많이 오간 건물이라 CCTV의 위치를 다 알고 있었지만, 화면 너머로 보는 건물의 모습은 괜스레 생경했다. 가끔 CCTV밑을 지나칠 때면 내 모습이 보일까 생각하며 인사를 하기도 했었다. 

1층과 2층 사이에 있는 경비실


서라벌 학원 

3층에는 학원이 있었다. 학원 이름은 '서라벌 학원'으로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다닌 곳이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학원이 생겼지만 그래도 학원으로 쓰기엔 워낙 좋은 자리인 듯하다.
이 학원은 두 부부께서 운영하시던 종합학원이었다. 아내분께서는 수학 선생님, 남편 분께서는 학원의 행정관리를 도맡아 하셨다. 아직도 중학교 1학년 때 집합에 대해 배우면서 A∩Bc을 "에이고 비여~" 하면서 가르쳐주신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다. 두 분 말고도 종합학원답게 여러 선생님들이 계셨다. 보통은 과목이름과 선생님의 이름을 합쳐 불렀다. 가령 '국김', '과윤'같은 식이었다. 한 번은 자습 감독 선생님을 친구들에게 알리려 큰 소리로 "야! 오늘 감독 국김이야!"라고 외쳤다가 교실 맨 뒷줄에서 업무를 보시던 국감 선생님께 "내가 네 친구냐? 어?"라고 혼난 적도 있었다.
아무래도 학원이라는 공간은 학교 다음으로 그 나이대에 친구들을 만나기 가장 좋은 곳이다. 그러다 보니 청소년기 가장 많은 추억이 쌓이는 곳이기도 했다. 보통 학원이 끝나면 9시 10시 정도였는데, 같은 또래 친구들은 축구공을 들고 바로 옆에 있는 공원 축구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인조잔디가 깔려있는 풋살장 규모의 축구장이 있어 그곳에서 반코트 경기를 하곤 했다. 때로는 한참 커 보였던 고등학생 형에게 공 차는 법을 배우기도 했고 어디서 배워왔는지 모를 각종 잔기술을 써가면서 지치는 줄도 모르고 축구를 했다. 나는 보통 골키퍼를 했기에 그때 처음으로 골키퍼 장갑이라는 것도 써봤다. 그것만 있으면 모든 공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렇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장갑을 낀 것만으로 실력이 꽤 올라간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학원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그만두게 됐다. 학원이라는 공간에 그만 다니고 싶었던 마음이라 어머니께 얘기하니 아무렇지 않게 그만 다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때 당시에 내가 좋아하던 두 선생님이 따로 학원을 차리게 되면서 더 그랬던 것도 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본시험에 충격적인 결과를 맞았다. 

서라벌 학원이 있던 자리에 다른 학원이 있다.


한상민 제과점 

얼마 전 토모루 과자점으로 바뀐 한상민 제과점은 나보다 오래된 곳이다. 지금은 검단에서 이어서 운영하고 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우리 동네에 한동안 유일했던 동네 빵집이었다. 주변으로 있는 다른 곳들은 모두 프랜차이즈 빵집이었다. 학생 때는 빵집에 갈 일이 많지 않았다. 안 그래도 없는 돈을 빵에 쓰긴 힘들었고 특히 고등학생이 되면서 등굣길이 바뀌다 보니 더욱이 갈 일이 없게 됐다. 그래서 먹을 일이라곤 부모님께서 가끔 사 오실 때뿐이었다. 그래도 몇 번 안 먹은 것은 아니었다. 집에 포도모양 쿠폰 스티커판이 있었던 것과 그 포도를 꽤 많이 채웠던 것을 기억해 보면 정말 자주 먹긴 했었다. 아마 아침으로 먹었던 토스트에 쓰인 식빵이 모두 한상민 제과점 식빵이었을 것이다.
이곳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내가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한 곳이기도 해서이다. 수능이 끝나고 20살이 되기 약 일주일 전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 사이트를 찾아 한상민 제과점 구인 글을 보게 됐다. 곧바로 문자를 남기고 연락을 받고 면접을 보러 가게 됐다. 면접을 보러 들어간 한상민 제과점은 괜히 평소랑 다른 느낌이었다. 매니저님과의 첫 대면. 첫 아르바이트라는 점에서 마이너스, 이곳 빵 많이 먹었냐는 질문에 누가 봐도 아닌 티 나서 또 마이너스... 면접을 보고 나왔을 때는 다른 곳을 알아봐야겠다 싶었다. 사실 그 마이너스도 나 혼자 생각한 것이긴 했지만 내가 사장이라면 후순위로 고려했을 대상임에는 분명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웬만해서는 안 뽑았을 이력서였는데 시키면 잘할 것 같아서 뽑으셨다고 했다.
아르바이트 생이 되고 나서는 꽤 열심히 움직였다. 특히나 매장에 남자는 매니저님을 제외하면 나뿐이어서 힘쓰는 일이 있거나 몸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해결하고는 했다. 물론 그런 일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빵 진열, 케이크 꺼내기, 커피 만들기 - 여름에는 빙수도 만들었다 - , 빵 식으면 빵 포장 등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제일 힘든 것을 뽑자면 빵 이름 외우는 것이었다. 포스기에 있는 각 빵의 카테고리와 이름들을 찍어서 집에서 외우고 케이크 포장법, 리본 묶는 법등을 배웠다. 배움은 더뎠지만 나름 열심히 따라갔다. 나중에는 매니저님이 매장을 비워도 알아서 척척 해내고 가끔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일을 알려줄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일을 하면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이 건물 안에 많은 부분을 이 제과점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어쩌면 유치원생 때부터 이 건물에 왔지만 2층에 빵공장과 창고가 있다는 점은 여태 모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야 왜 끝 쪽 계단에 빵이 쌓인 카트가 있었는지 알게 됐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빵 공장과 창고를 자유로이 드나드니 괜히 엄청난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오롯이 나만이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백스테이지에 자유로이 드나드는 스탭과 같았다.
이 제과점에서는 특별하게 담배를 팔았다. 편의점도 아닌 동네 빵집에서 담배를? 싶지만 매니저님이 설명해 주시길 담배권이 생길 당시 먼저 신청했다고 했다. 그 덕분에 담배를 사러 온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빵까지 사가게 되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도 담배를 사가시는 손님들을 더 잘 기억할 수 있었다. 손님들이 사가는 빵은 그때 그때 다르지만 보통 피는 담배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디스플러스만 피시는 하머니 한 분이 계셨다. 가게 통유리 너머로 할머니께서 걸어오시면 미리 담배를 꺼내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께서도 기억해 준다는 점에서 꽤 즐거운 느낌을 받으신 듯했다. 항상 웃으면서 받아주셨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동네 빵집이라는 점 때문에 할머니를 길에서도 뵐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인사를 드리니 기억해 주셨다. 아마 담배를 팔게 된 것은 매니저님이 설명해 주신 빵 매출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현재는 빵집이 바뀌면서 담배권은 바로 옆에 있는 금은방으로 넘어간 듯했다. 오랜만에 상가를 가 보니 금은방안에 담배 가판대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 금은방도 정말 오래된 곳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좋은 것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매니저님도 사람을 정말 잘 챙겨주시는 분이었고 함께 술을 먹기도 하고, 새로 나온 빵이나 케이크를 먹거나, 갓 나온 빵을 먹을 수도 있었다. 땀 흘려 일하며 바쁠 때에도 스트레스가 아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연장 근무를 할 때 먹었던 빵공장 이모님의 반찬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고 빵공장 분들도 많은 교류는 없었지만 자신들의 위치에서 빵을 빚어내는 모습이 그렇게 빛나보일 수 없었다.
내가 군대를 가게 되면서 1년 2개월의 추억을 매듭짓게 됐다. 그 마지막 날에 매니저님은 선물과 편지를 나에게 쥐어주셨다. 내가 사회에서 받아본 처음이자 가장 큰 칭찬들이 적혀있었다. 비록 사람을 챙길 줄 모르는 나였기에 전역하고 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가끔 연락드리면 여전히 감사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받아주신다. 

현대상가 전경. 한상민 제과점이 있던 자리에 토모루 과자점이 들어왔다.


자전거 수리점 

자전거 수리점을 횟수로 보면 제일 안 간 곳이지만 제일 오래 다닌 곳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그곳에 갈 일이 자전거를 탈 때뿐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때는 자전거를 정말 많이 탔다. 학교를 갈 때도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도.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자전거 수리점에 갈 일도 많아졌다. 바퀴에 바람은 빠지기 마련이었으니까. 물론 자전거 말고도 공에 바람을 넣으러 가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곳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공에도 바람을 넣을 수 있게 해 주셨고 자전거든 공이든 언제든 사용하라고 에어건을 밖에 꺼내두셨기 때문이다.
이곳은 동네에 유일한 자전거 수리점이었다. 무엇보다 접근성이 좋은 덕에 아마 자전거를 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자전거를 수리하지 않았을까 싶다. 수리점 앞에는 자전거 여러 대가 세워져 있고 안에는 각종 자전거와 부품들이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그 덕에 수리점은 밝은 날에도 어두컴컴했는데, 어릴 땐 그게 무섭다기보단 신기했다. 아마 전문적인 것을 다루는 느낌이 물씬 나서 그랬을 것이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몰라도 주인은 본인의 기준으로 정리해 둔, 딱 그런 곳이었다. 자전거를 수리할 때면 아저씨는 가게 안에서 금방 필요한 물건을 꺼내 수리해 주셨다. 찾느라고 뒤적일 필요도 없이 물건을 꺼내셨다.
수리점은 자전거를 타던 중학교 때 제일 많이 가다가, 고등학교, 대학교를 가면서 거의 가지 않게 됐다. 그때부터 자전거를 타는 빈도수가 줄었고 특히 대학생이 되면서는 아예 자전거를 탈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최근 자전거가 생기면서 다시 그 가게를 찾아가게 됐다. 집에서 불과 5분 거리지만 수리점이 없어졌을까 가는 동안 걱정이 들었다. 그 정도로 자주 가지 않기도 했고 자전거를 타지 않으니 굳이 기억할 일이 없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수리점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앞에 자전거가 나와있는 것도 안에 여기저기 물건들이 걸려있는 것도 그대로였다. 사장님은 기억보다 주름이 더 깊이 파인 모습이었다. 그래도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셨기에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특별히 인사를 더 하지는 않았다. 아마 아저씨가 나를 기억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나는 수리점에 간 목적에 딱 맞게 자전거를 수리하고 돌아왔다. 


현대상가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있다. 그 온 마을의 역할 중 이 현대상가의 역할도 꽤나 컸다. 게임 던전 같은 지하, 건물 안 미로 같은 1층, 빵냄새가 나는 2층과 공부하는 3층. 나는 이런 건물 덕에 지금까지 클 수 있었다.
시긴의 흐름에 맞게 건물의 모양새도 오래된 티가 많이 난다. 그럼에도 이 건물에서 시간을 보낸 아이들은 이곳에 있던 자신의 모습을 분명 추억할 것이다. 그 안에 자신의 역사가 곳곳에 배겨있기 때문에.

 

현대종합상가의 정문입구. 예전에는 현대가 한자로 돼 있었고 파란 배경도 없었다.
흐른 시간만큼 많이 얼룩진 현대상가
건물 1층에 있는 분식집. 컵떡볶이니 핫도그니 군것질 하던 곳이다.
상가 1층 어딘가에 있는 재봉틀
상가 1층에 미로같은 공간
1층과 지하 사이의 중간층. 초등학생 때 경비아저씨 몰래 미끄럼틀로 쓰곤했다.
상가 내에 붙어있는 전시국민행동요령과 대피소 안내
건물 옥상에 솟은 강아지풀. 학생 때 이곳은 어른들에 의해 출입금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