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Hz>, 연희집단 The 광대

2024. 1. 2. 00:58문화에서 마음 잡기

<52Hz>, 연희집단 The 광대

01. 연희 재밌네

 연희극을 접한 건 이제 반년 정도 됐다. 솔직히 풍악, 판소리, 사물놀이, 이런 것들을 접할 기회가 일상에서 얼마나 있나. 연극, 뮤지컬 보다도 접할 기회가 많이 없고 눈에 보여도 손이 잘 안 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국악은 지루하고 재미없거나 반대로 너무 시끄럽다는 인식 속에 살고 있었다. 그 생각은 반년 전에 '딴소리 판'을 보고 완전히 뒤집혔다. 그 극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전들을 거지광대들이 헤집고 다니는 얘기인데, 그들이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움이 웃음을 만들어내고 동시에 광대극에서 볼 수 있는 시원시원하고 유려한 움직임이 더해져 '오묘한 멋있음'을, 곧 재미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난 그 매력에 빠져 그 후로도 몇 개의 광대극을 더 봤다.

<52Hz> 포토존

02. 고독으로는 뭔가 아쉬워

 이번에 봤던 52Hz 또한 광대극이었는데 이번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조금 더 감정적이고 미시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다른 것들이 연희의 특성(우스꽝스러움, 재담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이번에는 감정을 중심에 두고 연희의 요소들을 가볍게 추가한 것같았다. 다르게 말하면 연희의 요소를 뺐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로 감정 중심적인 극에, 연희라는 표현요소를 넣어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 듯했다.

 극 설명에 따르면 본 극은 '소통'과 '고독'에 대한 얘기를 다룬다고 한다. 52Hz라는 제목도 그러한 중심감정에서 비롯한 제목일 것이다. 어디서 발생한지 모를, 생소하고 의문투성이인 52Hz 음파. '가장 외로운 고래'라는 별명이 붙게 된 이 음파를, 대표되는 감정의 비유로 쓴 듯했다.

 다만 극을 다 본 나는 주된 감정에 있어서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접근했다. 나는 '사회적 좌절감'과 '낮은 회복 탄력성'(혹은 자아의 붕괴)에 더 포커스를 두고 싶었다. 그러면 감정을 쫓아가는데 더욱 수월할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이를 설명하려면 약간의 극 설명이 필요하다.

 주인공 '선'이 초반부에 모든 존재들로부터 부정 당하는 장면이 플레이된다. 각종 생물들, 그리고 자신의 아들까지. '선'에게 그들은 다가가 안아줄 정도로 애정이 가득한데 그들은 '선'을 경멸하고 그와 직접 닿은 부위기 더럽게 느껴지는 듯 툭툭 털고선 퇴장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서 어린아이의 시선, 감정, 생각, 혹은 동심이 부정당하고 무너졌다고 느꼈다. 특히 혼이 빠져나간 듯 넘어지는 덜미에서 그 생각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자세히 말하자면, '선' 자신의 내면적 갈등 끝에 어른인 자신의 존재가 어린아이의 성향을 가진 자아에게 부정당하고 배척당한 것으로 보였다.(자아의 붕괴)

 그 후로 이어지는 장면은 사회성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와이셔츠를 입은 군단이 펭귄처럼 나타나서는 '선'에게 압박을 주고 퇴장하기를 반복. 후반에 가서는 그를 타박하고 괴롭히기까지 이른다. 여기서 '선'이 "싫어.. 싫다고..."를 되뇌는데, 대사가 거의 없는 극에서 대사를 활용한다는 것은 감정을 직접 전달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져서 '선'이 그 상황을 대하는 태도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상황에 정신적인 압박을 받고 있고, 그 상황을 개인이 이겨내기엔 불가능해 보였다.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에게 생긴 정말 아끼는 물건을 빼앗기고 그 존재가 회생 불가능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이는 '선'으로 하여금 좌절의 깊은 골짜기로 더욱 밀어 넣는 사건이 되고 그는 실제 행동(폭력)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이후 장면으로 아들(개인적으로 생각한 어린아이 자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 욕조에 들어가는 장면, 고래가 되고, (아마 내면의 잘못된 대상에게)복수를 하고, 진정한 고독의 시간을 겪고, 그것들을 다시 회복하는 장면들이 이어지며 본 극은 끝이 난다.

 후반부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초반부를 자세히 얘기한 것은 중심감정이 초반에 설정되기 때문이다. 초반 장면들에서 설정된 중심감정으로 후반부의 행동들이 설명된다 느꼈기에 초반부를 좀 더 세세히 설명했다.

 '선'은 자신의 내면 및 사회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 과정에서 내면과 사회는 자신을 부정한다. 그런데 내면이 부정하는 '선'과 사회가 부정하는 '선'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내면은 '선'을 무시하고 배척한다. 사회도 '선'을 무시하지만 배척하는 느낌은 아니다. 되려 찾아와서 괴롭힌다. 가령 흩뿌려진 종이를 모으고 주으면 다시 와서 흩뿌리거나 모으는 종이를 짓밟고 발로 차고 주변을 돌면서 종이를 바닥에 던진다. 결국 사회와 '선'은 지속적인 교류를 나누고 있다. 이 점에서 중심감정을 '고독'으로 해석하기엔 무언가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 이상에 있는 것을 고민하다 잡아낸 것이 '사회적 좌절감'이다.

 사회적 좌절감은 자신의 존재가 무시받고 낮아지는 것이다. 여느 사람이나 사회적 좌절감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이 좌절감을 반복해서, 쉴 틈 없이 느끼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다. 심지어 사람마다 좌절감에 따른 회복 탄력성의 정도도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는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좌절감을 느낄 수도 있다. '선'은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이 좌절감을 경험한다. 극 중에서는 그 좌절감을 회복할 틈도 없다. 되려 좌절하는 중에 좌절을 얹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 자신의 회복 탄력성의 원천인 자아*가 본인을 부정하고 있다면 그 좌절감에서 돌아오는 건 더욱 어려울 것이다. 거의 불가능하다.

 '고독'은 이 사회적 좌절감과 낮은 회복 탄력성(혹은 자아의 붕괴)의 결과로 보여지는 감정 중에 일부다. '선'이 그 이후에 보여주는 폭력성과 외로움, 자기혐오 또한 '고독'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는, 내면의 감정에서 발현된 결과물들이다. 그래서 '고독'으로 극 전체를 보기엔 아쉬움이 느껴졌다**

 나는 사회적 좌절감을, 낮은 회복 탄력성으로 겪은 '선'을 중심으로 극을 쫓아갔다. 그러니 '선'이 느끼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감정들을 온전히 쫓아갈 수 있었다. 한편으로 그 감정들은 나도 겪어봤고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03. 연희가 섞여 더 재밌는 표현

 연희극, 연극 등에 조예도 지식도 없는 내가 한 작품을 보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표현할 수 있는 건 그만큼 극의 표현이 좋았다는 뜻일 것이다. 초반에 세계관으로 끌고 들어가는 접부채로 표현한 해양생물들도, 연희자들의 연기력도, 조명 디자인과 아레나 형식의 무대도, 음악도, 연희에서 볼 수 있는 움직임도 모두 '선'의 감정을 중심에 두고,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구성돼 있었다. 그래서 온전히 극에 집중에 관람할 수 있었다.

 가장 좋았던 표현은 용의 탈을 쓴 자(필자가 임의로 붙임)였는데, 내 시선에서 그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자 '선'의 회복하려는 자아 혹은 어린아이 자아의 대장처럼 보였다. 개연성 없이 나타나 '선'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게 해 주는데, 강요하진 않지만 선택의 가짓수를 여러 개 주는 것도 아니어서 신적인 존재 = 데우스 엑스 마키나 = '선'의 내면 자아로 보인 것이다. 나도 내 삶과 내면에 분명 그런 존재가 있었기에 힘든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다만 힘들었던 내면도 나아지려고 했던 내면도 모두 '나'였기에 무의식에서도 구분 짓지 못했던 존재였을 뿐이다.

 처음엔 의아했지만 진행될 수록 이해된 것은 아레나 극장이었다. 4면이 객석이어서 연희자는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연기를 해야 한다.*** 또 구성 자체도 틈 없이 구성해야 네 면의 눈들을 모두 채울 수 있는데, 초반에 진행될 때는 아레나 극장을 굳이 왜 썼을까 싶다가도 무대를 채우는 연희자들의 움직임을 보자마자 그 생각이 쏙 들어갔다. 역시 배운 사람들의 선택이 보통 옳다.

 자신이 사회적인 좌절감도 겪어봤고 그 좌절감을 회복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더라면(보통 사회생활을 한 사람들은 다 있었을 듯하지만) 분명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극일 것이다. 또 이 극단은 매번 연희극을 시의적절한 요소들과 결합한다. 그 결합은 내용일 수도 있고 시각적인 요소 혹은 다른 것일 수도 있는데, 그 점이 연희극에 알지 못한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공연은 12월 29일-30일로 끝이 났지만, 올해 재연 소식이 뜨면 잊지 말고 관람해 보시길.

 

* 회복 탄력성은 그 단어에 비해 생각보다 의미가 깊은 단어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느 정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다만 그저 극을 재밌게 본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에 빗대어 작품을 해석한 정도로만 봐주면 좋겠다.

** 다만, 그 감정을 제일 잘 표현할 수 있고 동시에 공식 설명에 들어가기에는 '고독'만큼 표현하기 좋은 큰 감정도 없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고뇌에 고생했을 기획팀에게 박수를...

*** 생각해 보면 저잣거리 광대극은 모두 아레나 극장이었던 것 같기도...

 

00. TMI


TMI 1. 안대천 연희자님은 종이 뭉텅이를 잘 던지신다. 예전에 전혀 관련 없는 어떤 촬영 현장에서 종이를 제대로 못 던져서 몇 번이나 다시 갔는데 안대천 연희자님은 무대를 가득 채워 던지시더라.

TMI 2. '선'을 연기한 선영욱 연희자님은 선정리를 정말 잘하신다. 끈 달린 종이컵을 자신한테 당겨 오는데 무대 경력이 묻어나는 선정리를 보여주셨다. 아마 습관처럼 선을 당기신 것이 아닐까 싶다.

TMI 3. 이강산 연희자님의 싸늘한 표정은 무서울 정도다. 연기를 무척 잘하시는 듯...

TMI 4. 김용훈 연희자님은 복어 표현을 무척 잘 하신다. 나도 한 번 찔러보고 싶었을 정도.

 

'선'의 자아로 들어가는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