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30. 20:00ㆍ문화에서 마음 잡기

전시를 했다. 뭐 개인전같이 엄청난 것을 한 건 아니고, 그룹전에 한 작품 올렸다. 물론 이것도 꽤 멋있는 일이긴 하다.
이번 전시에 올린 작품은 작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갔을 때 촬영한 사진이다. 순례길 2일 차. 포르토마린에서 팔라스 데 레이로 가는 길이었다. 순례길을 걸은 지 얼마 안 돼 다음 마을까지 얼마나 걸릴지 확신이 없었기에, 동트기 전부터 준비를 마치고 출발했다. 마을을 벗어나 산 길에 접어들 때 즈음 저 멀리서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주변은 금세 환해졌다. 그럼에도 이른 출발, 비수기 탓에 길을 걷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시골을 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새벽 산은 안개가 자욱하다. 자욱한 안개로 인한 짧은 시야, 보이지 않는 사람, 내 걸음과 가방과 옷이 마찰되는 소리만 있는, 이 오르막을 얼마나 오래 걸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안개와 하나 돼 멈추지 않고 걸었다. 그리고 어느새 안개 숲길에서 벗어났다. 쭉 뻗은 도로 위에서 주변을 보니 시원하게 열린 언덕과 몇 개의 건물들이 보였다. 그리고 내가 걸어온 길엔 나무들과 여전히 뭉쳐있는 안개가 있었다.
당시 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는 내 안에 순례자를 봤던 것 같다. 끝이 어딘지 모르는, 안개가 자욱한 길을 걷는 모습이 그 시간을 살고 있는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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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몬에서 사진 제작을 주문했다.(아쉽게도 광고가 아니다. 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받았다.) 인화지를 고르고 내 사진 사이즈에 맞는 액자 프레임으로 맞춤 제작을 했다. 사진이 도착하고 액자 프레임의 하단을 톱으로 잘라냈다.
나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진 속 도로가 관람객이 서 있는 곳까지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멀리 안개가 가득한 길, 혹은 그 너머 오르막부터 관람객이 서있는 길, 다음작품을 보러 걸어갈 길까지 이어지길 바란 것이다. 그 길 위에서 저 안갯속 길과 하늘을 바라보길 바랐다. 그래서 잘라냈다.
내가 느끼기에 '액자'라는 프레임은 창문의 프레임과 동일하다. 내가 머무는 세상과 다른 세상을 구분 짓는 경계이면서 그 다른 세상의 일부를 잘라 보여주는, 선택된 화면이다. 사진과 다른 점이라면 창문의 선택된 화면은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점이겠다. 그런 프레임의 일부를 들어내면 프레임을 기준으로 나눠진 세상이 합쳐진다. 그럼 내가 있는 세상과 프레임 밖 다른 세상이 아닌, 프레임의 안과 밖 모두 내가 있는 세상이 된다.
그래서 전시회에 걸려있는 액자의 높이가 좋았다. 딱 사람의 시선 높이에 있어서 올려다보지도, 내려다보지도 않아도 되는, 자기 세상의 시선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워낙 어두운 사진이었기에 조명이 필요했다는 점과 바닥에 놓인 다른 작품이 내 작품과 적당한 거리를 만들 수 없게 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본 전시는 개인전이 아니었다.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서로의 작품을 존중하는 전시 었기에 충분히 이해할만한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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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했다는 거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진을 고르고 실물로 그 사진을 마주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항상 디지털 기기 너머로만 보던 사진들이었는데, 질감이 보이는 종이 위에 새겨진 내 순간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남겼다. 사진을 처음 받고 꽤 오래 들여다봤던 것 같다.
사진은 아마 판매가 안될 것 같으니 전시가 끝나면 다시 집에 걸어둬야겠다. 내가 안갯속에 걷고 있을 때, 어느새 다다라 내가 걸은 길을 다시 뒤돌아 볼 날을 상상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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