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3. 15:19ㆍwith_essay_rain

한창 촬영을 하고 있을 때, 누나가 아버지께서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며 연락해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전날부터 귀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나더니 아침에는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나는 회사를 매형에게 맡겨두고 아버지와 함께 병원을 가러 성수에서 인천까지 갔다. 그 와중에 아버지께서는 와달라는 것도 아니고 병원에 가게 택시를 불러달라고 하셨단다.
진료를 함께 본 누나에게 얘기를 들으니 내이염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귀 안 쪽에 염증이 생긴 건데, 과로, 피로, 스트레스 등 발병 원인이 너무나 다양해 콕 집어서 '무엇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와중에 뇌까지 염증이 퍼졌을 수 있어 MRI를 찍는다고 했다. 때문에 그다음 날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저녁에 아버지께 전화를 해보니 걱정했던 것보다 밝은 목소리였다. 걱정된다는 말에 아버지께서는 '나이가 드니 몸이 고장 나는 것.'이라며 너스레를 떠셨다.
이튿날 조감독님께 양해를 구하고 아버지를 뵈러 인천으로 향했다. 집에 계신 아버지를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정신없는 병원에 우리 가족들은 여기로 가냐, 저기로 가냐 하며 길 찾기 사투를 벌였다. 결국 입원수속까지 마치고 아버지를 입원실 앞에서 배웅하고 왔다. 코로나의 여파로 입원실에는 상주 보호자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MRI 검사는 다음 날 이른 새벽에 이뤄졌다. 원래 이튿날 오전, 늦으면 그다음 날까지 미뤄질 수 있다고 했는데, 예상보다 빨리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검사 결과 뇌에 특별한 이상은 없으며, 세 번의 주사와 약 복용만 하면 된다고 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낫는 것은 아니었다. 청력 회복은 거의 1년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었다. 청력 손실의 연장선으로 이명과 어지럼증도 함께 찾아왔는데, 그나마 어지럼증은 지속적인 운동으로 나아질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와 누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갔다. 그날 저녁 아버지에게 미안함이 섞인 고맙다는 연락이 왔다. 아버지께 좋은 말을 들은 게 얼마만이지.
그다음 날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가기 위해 짐을 싸 인천집으로 왔다. 추석연휴 때까지 있는 거라 겨우 일주일 있는 거였지만, 독립 세 달여만에 복귀였다. 병원을 가기 전 아버지와 함께 기사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 식당은 예전부터 유명했는데, 가격에 비해 반찬이 알차게 나오는 뷔페 형식의 식당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종종 그 식당을 가곤 했다. 내 음식과 아버지 국물을 퍼 자리에 온 나는 음식을 가지고 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봤다. 어지럼증 때문인지 걸음은 느려졌고 예전보다 등은 굽어있었다. 시간이 만들어 놓은 얼굴의 선들은 아버지의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나 생각하게 만들었다.
병원에 도착해 주사를 맞고 30분가량 누워있었다. 귀에 주사를 맞으면 어지러움 때문에 누워있다 가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고 병원 서류를 떼러 잠깐 데스크를 들른 사이 서 있던 아버지께서 크게 휘청이셨다. 로비에 있는 사람과 부딪혀 죄송하다고 연신 말씀하셨다. 아버지를 얼른 부축해 바로 세워드렸다.
추석 연휴 첫날 토요일. 어머니를 뵙고 가족들끼리 화천을 갔다. 아버지께서 몇 년 전부터 놀러 가시던 펜션이 있는데, 긴 연휴를 맞이해 다 같이 놀러 가기로 한 것이다. 가족끼리 여행을 간 게 7-8년 만이었다. 그 마저도 내가 군대에서 외박을 나왔을 때 갔던 가평이었다. 하루종일 비 소식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돌아가는 날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우리는 펜션 뒤에 있는 계곡에서 놀았다. 아버지께서는 물에 발만 담그고 조심조심 걸어 우리들 곁 바위에 앉아 노는 걸 지켜보셨다. 우리는 여행 때 으레 그랬듯 고기를 구워 먹었고 캠핑을 즐기는 누나네가 준비한 화로로 불멍까지 했다. 가로등도 거의 없는 화천의 하늘에 먹구름이 걷혀 무수히 많은 별이 보였다. 집에서 잠을 깊게 못 주무시는 아버지께서는 그날 누구보다 먼저 잠에 드셨다.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안 그래도 못 주무시는 아버지는 이명 때문에 더 잠에 못 드셨다. 함께 걸어 다닐 때는 중심을 잡기 위해 나를 붙잡고 걷고는 하셨다. 아버지께서 만들어 놓은 인간관계 덕분에 걱정해 주시는 주변 분들이 많으셨다. 그래도 항상 옆에 있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연휴의 끝이 다가올수록 걱정이 커졌다.
연휴의 마지막 날. 이제 집에 간다는 내 말에 아버지께서는 분주히 냉장고에서 먹을거리들을 꺼내셨다. 김치, 잡채, 식혜, 과일. 혼자 사는 데다 잘 먹지도 않는 아들 집에 뭘 그렇게 주시려고 하는 건지 싶었다. 결국 나는 양손에 한가득 비닐과 쇼핑백을 들고 집을 나섰다. 결국 나도 내 집에 돌아가야 했지만 그럼에도 쉽사리 간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괜스레 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고 천천히 차에 탔다. 차를 뺄 때도 느릿느릿 빠졌다. 그 와중에도 괜히 넘어지시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멀어지는 나를 보는 아버지를 살폈다. 아버지께서는 조심히 가라며 인사해 주셨다.
나는 가족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부모님께 잘하는 아들도 아니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아버지랑 종종 갈등이 나타나곤 했다. 생활하고 생각하는 방식이 너무나 다른 탓이었다. 독립의 이유 중 한 부분이기도 했다. 부모님한테 잘해야 한다는 행위의 사실 자체는 오랜 교육으로 알고는 있었다. 문제는 그 행동을 이끌어 낼 마음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마음은 있다. 어떤 감정이 생겼는데, 그 감정이 뭔지 모르겠다. 아버지에 대한 측은지심 같기도,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 같기도, 누나가 졌던 무게에 대한 공감과 미안함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것이 생겼다.
그저 아빠가 건강히, 자기가 행복한 삶을 살 길 바랄 뿐.이라는 글로 일단 맺어본다.
'with_essay_rai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니를 빼다 (0) | 2023.12.14 |
---|---|
카메라, 삼각대 그리고 북한산 (6) | 2023.06.11 |
아버지께서 기타학원에 등록하셨다. (9) | 2023.05.17 |
미드테이블 (10) | 2023.05.11 |
두 번째 마중 (0) | 2023.02.12 |